네 명의 여성이 보여주는 사랑과 혁명의 이중주 [역사의 뒤 페이지]

investing : 영화는 쓸쓸한 바닷가에서 시작한다. 덴마크의 외딴 마을, 나이 지긋한 자매 마르티나와 필리파가 목사 아버지가 남긴 작은 교회를 이어가며 소박하게 살고 있다. 어느 날 프랑스 여인 바베트가 등장하고 사건이 일어난다. 〈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악셀 감독, 1987) 이야기다.

주식 : 영화는 49년 전, 자매가 젊고 빛나던 시절로 돌아간다. 젊은 구애자들 중 스웨덴에서 온 장교 로렌스와 파리에서 온 파핀이 특히 진지했다. 자매의 마음도 부풀었다. 딸들이 사역을 돕기 바란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자매는 순종했고 나이를 먹었다.

35년이 흐른 1871년 9월의 어느 밤, 프랑스 여성 바베트가 자매를 찾아왔다. 내전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는 파핀의 편지를 들고서. 그저 살게만 해달라는 부탁이다. 세 여인의 동거가 시작되고, 바베트는 묵묵히 일한다.

14년 후 어느 날, 바베트는 복권에 당첨되고 1만 프랑을 손에 쥔다. 자매는 이별을 예감하고, 바베트는 홀로 해변을 걷는다. 이윽고 간청한다. 소천한 아버지 목사의 100세 생일 때 ‘진짜’ 프랑스 요리를 대접하겠노라고. 자매는 거절하지 못한다.

프랑스에서 엄청난 재료들이 도착하고 요리가 준비된다. 쾌락을 죄악시해온 자매와 교회 사람들은 기절할 만큼 화려한 ‘사탄의 음식’ 앞에서 경악한다. 우연히 만찬에 참석한, 이제 노장군이 된 로렌스가 분위기를 바꾼다. 파리 주재 시절, 고급 레스토랑 카페 앙글레에서 맛보았던 최고의 프랑스 요리와 똑같다며 감격한다. 그의 진심 어린 찬사에 회중도 마음을 연다. 함께 늙어가며 쌓아온 미움을 술과 음식으로 녹인다. 자매도 젊은 시절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별을 준비하는 자매 앞에서 바베트가 말한다. “여기 계속 살 거예요. 1만 프랑을 이 만찬에 다 썼죠. 저는 카페 앙글레의 수석 요리사였어요. 거기 12명분 만찬이 딱 1만 프랑이죠.” 서로 끌어안으며 영화가 끝난다.파리코뮌의 전사 드미트리예프

바베트는 전 재산을 조건 없이 ‘탕진’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그 만찬은 금욕주의자들의 일상을 뒤흔든 감각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이방인을 받아들인 자매의 환대가 먼저 있었다. 함께한 14년의 일상도 있었다. 더 가난한 이를 도와온 누추한 일상이 있었기에 환대도 만찬도 빛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영화는 소박한 절제와 만찬의 희열 사이를 오가며 삶의 양면성에 대해, 사랑의 무조건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파리 최고의 요리사였던 바베트가 남편과 아들을 잃은 내전을 역사는 파리코뮌이라고 부른다. 70일간 타오른 불꽃같은 혁명이었다. 나폴레옹 3세가 패배한 후 성립한 제3공화국 정부가 프로이센에 대한 항복을 모색하면서 의용병들을 해산하려 하자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1871년 3월18일이었다.

코뮌은 인민주권 원칙에 따라 평의원들을 선출했다. 노동자 경영 참여, 하루 10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임대료 통제, 의무교육, 정교분리, 외국인과 여성의 권리 인정 등 꿈같은 정책들이 펼쳐졌다. 왕당파와 부르주아들이 치를 떨었다. 프로이센과 협상해 40만명의 군대를 빼내 총구를 파리로 돌렸다. 5월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1주일’ 동안 수만 명을 학살했다. 〈프랑스내전〉 서문에서 엥겔스가 회고하듯, “후장총으로는 충분히 빠른 속도로 사살할 수 없어서 수백 명씩 기관총으로 집단 총살했다”. 바베트의 남편과 아들도 그렇게 죽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되고, 망명을 떠났다. 바베트처럼.

바베트는 코뮌에서 무엇을 했을까? 알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이 코뮌에 참여했다. 파리코뮌의 구성 조직 중 가장 큰 축에 속한 ‘파리의 방어와 부상자 간호를 위한 여성동맹’의 지도자 루이즈 미셸(1830~1905)이 유명하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그녀는 코뮌이 수립되자 바리케이드에서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유형을 거치며 아나키스트가 됐고,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반식민주의 투쟁에 앞장섰다. 동물권 옹호와 생태주의의 길도 열었다.

루이즈 미셸은 독신을 고수했다. 사랑과 혁명은 종종 대립했다. 선택은 달랐지만 러시아 출신의 여성 코뮌 전사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예프(1850~1918)의 삶도 그랬다. 귀족의 서녀로 자라며 마르크스를 읽고,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심취했다. 자유롭게 사랑하는 여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처럼 살고 싶었다. 퇴역 대령과의 ‘편의 결혼’을 통해 독립을 얻고, 제네바로 가서 망명자 그룹에 참여했다. 노동자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여성 노동자들을 모았다. 막 결성된 제1인터내셔널에도 참여했다.

1870년 12월, 제네바 러시아 망명자 그룹의 특사로 런던 인터내셔널 총회에 파견됐다.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깊게 교류했다. 파리코뮌이 발발하자 마르크스는 그녀를 인터내셔널의 밀사로 파견했다. 3월 말 파리에 도착한 그녀가 사용한 가명이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예프였다. 그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여성동맹의 집행위원이 되어 일하고 싸웠다. 피의 1주일 동안 여성 전사들과 함께 바리케이드를 지키다 부상을 입고 스위스로 탈출했다.

이후 삶의 결은 좀 다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런던의 지도자들이 끝내 파리에 오지 않은 것이 상처가 된 듯하다. 러시아로 돌아갔고, 사랑에 빠졌다. 젊고 잘생긴 연인은 부자에 대한 갈취 같은 음모론적 방법에 심취하다가 1876년에 사기와 횡령 혐의로 체포됐다. 살인교사 혐의도 추가됐다. 마르크스가 정치범을 무료 변론하는 변호사를 찾아 연결해주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됐다. 합법적 배우자만 동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식 결혼을 했다. 일반범으로 분류된 이 가족은 시베리아의 정치범 공동체로부터 배척받았다. 남편은 끝내 사면받지 못했다. 1899년 홀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가 1902년경 두 딸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옮겼다. 1918년쯤 세상을 떠났다. 모스크바 이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혁명도 사랑도 쉽지 않았다. 세계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만큼이나 가족의 세계를 지키기도 힘들었다. 어느 쪽이 더 귀하다고 선뜻 말할 수 없다.

사랑도 혁명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였다. 드미트리예프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김알렉산드라, 1885~1918)의 삶을 생각해본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김알렉산드라는 아버지가 통역으로 일하던 동청철도 공사 현장에서 중국인, 조선인 이주 노동자들이 착취받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자사범학교에 다닐 때 비밀 독서회에서 체르니솁스키의 여주인공 베라에게 빠졌다. 제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교사가 됐다. 함께 자란 폴란드계 동무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술과 도박에 빠졌고 폭력도 휘둘렀다. 이혼도 거부했다. 결국 집을 떠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위험할 때면 신한촌의 러시아정교회를 찾아가 귀화 한인 오 바실리 신부에게 의탁했다. “바실리를 떠올릴 때마다 꺼칠한 수염의 촉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처자가 있는 사제와 사랑에 빠졌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둘째가 태어났고 바실리는 사제복을 벗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랄 지역의 무기공장과 벌목장으로 많은 한인·중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동원됐다. 착취에 노출된 노동자들을 위해 가족을 둔 채 우랄로 이주했다. 작업 조건이 혹독했다. 그녀는 우랄노동자동맹 결성을 주도했고, 1917년 혁명을 거치며 볼셰비키 지도자가 됐다. 하바롭스크의 소비에트 외무위원이 됐고, 극동인민위원회에 대표로 참석했다. 한인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억류한 이동휘 석방에 힘을 쏟았고, 이동휘, 홍범도, 이동녕, 안공근, 안정근 등이 참여한 한인망명자대회를 조직했다.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탄생에 산파 노릇도 했다.

적백 내전의 격화 속에 하바롭스크를 탈출하다가 백위군에 체포됐다. 전설적인 볼셰비키 투사를 잡은 백위군이 환호했다. 회유와 고문에도 끝내 전향을 거부했다. 1918년 9월16일, 아무르 강변에서 처형됐다. 마지막 순간에 두건 쓰기를 거부했다. “나는 죽음을 똑똑히 보고 싶소.”

그녀는 두 아들의 엄마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면 집에 와서 껴안곤 했다. 1916년 우랄에서 노동자들과 있을 때 바실리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 “아, 가엾게도, 귀여운 아이들. 왜쩨와 보리스를 부탁하오. 노동과 근면을 하도록, 힘없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사랑하도록 길러주오. 나의 키스와 포옹을 전해주오. 나의 소중한 바실리. 안녕. 당신에게 키스를, 포옹을, 영원히.”(직접 인용문은 김알렉산드라의 평전을 쓴 정철훈의 〈소설 김알렉산드라〉에서)여의사 이덕요가 사랑한 사람들

김알렉산드라의 목숨 건 사랑이 헛되지 않은 것일까, 미구에 한반도에선 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녀 덕분에 자유를 얻은 이동휘(1873~1935)의 마음이 어땠을지. 3·1운동 후 난립한 ‘임시정부들’이 그를 정부수반이나 군사책임자로 발표했지만 수락하지 않았다. 숙의 끝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아 1921년 초까지 활동했다. 임시정부 내 좌파를 이끌며 이승만에 맞섰다.

상하이의 이동휘 동지 중에 젊은 한위건(1896~1937)이 있었다. 경성의전의 만세운동을 이끈 후 망명해 임시정부의 내무위원으로 일했다. 와세다에 유학하던 1921년에는 이동휘가 이끈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내지위원’이 됐다. 귀국 후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고,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에 참여했다. 1928년 가을, 검거를 피해 다시 망명했다. 1930년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반제투쟁을 전개했다. 이철부라는 가명으로 당내 좌경 맹동주의를 비판하는 ‘철부노선’을 제시하며 싸우다 숙청됐다. 1936년 류샤오치에 의해 복권, 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톈진시위원회 서기가 됐다.

한위건의 처 이덕요(1900?~1932)는 도쿄 여자의전 출신 의사로서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였다. 여성계 독립운동단체 근우회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고, 의학지식 보급과 여성해방에도 앞장섰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던 남녀가 결혼만 하면 남자는 그대로 남존여비의 횡포한 행동을 한다”라며 일갈했고, “우리 여성은 이 불합리한 인습을 타파하기 위해 굳게 모이라!”고 촉구했다(이덕요, ‘인습타파가 목전의 문제’, 〈동아일보〉 1927. 7. 2.).

1931년 5월 이덕요는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남편 한위건을 따라갔다고 세간에서 수군거렸다. 〈독립운동열전〉을 쓴 역사학자 임경석은 동지들이 “한위건과 나란히 반일 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려는 의도에서 망명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럴 것이다. 따라갔으면 또 어떤가? 여성이라면 유명인사라도 언론이 나서서 사생활을 함부로 품평하던 시절이었다.홀몸이 된 그녀가 겪었을 고충이 어느 정도였을까.

이덕요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또 다른 사랑 이야기도 해야겠다. 그녀가 망명한 베이징에는 ML당 책임비서를 지낸 안광천과 여성 사회주의자 이현경 부부도 와 있었다. 이덕요와 이현경은 경성여고보 동창이었다. 이덕요가 둘 사이를 회고한 글이 남아 있다. 둘은 “장편의 소설 한 권은 넉넉히 될 만큼” 사랑을 나눈 사이였다. 고등여학교 시절 둘은 “어디를 가도 같이 가고 잠을 자도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자며 그외 모든 것을 다 한몸 한뜻과 같이” 했다. 결혼하지 않고 이덕요와 살겠다고 부모에게 선언한 이현경이었다. 교사를 그만두고 도쿄까지 따라왔다. 여자 유학생 H와 K도 이덕요를 사랑했으니 사각관계가 됐다. 분노한 이현경이 방에 이덕요의 사진을 걸어놓고 저주하며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다 꿈과 같아서 우습기도 하고 그립기도 합니다(‘여류 명사의 동성연애기’, 〈별건곤〉 제34호, 1930).”

이덕요처럼 담대하게 동성애 경험을 털어놓은 이를 찾기 어렵다. 그녀의 망명은 사랑을 위한 것이었을까, 혁명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 사랑은 한위건이었을까, 이현경이었을까?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아무렴 어떠랴.

이덕요는 베이징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복권된 그녀의 남편 한위건은 이듬해인 1937년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이현경과 안광천의 후일은 역사에 전하지 않는다. 사랑은 혁명의 씨앗이 되고, 혁명은 최고의 사랑이어야 했다. 실제로는 혁명도 사랑도 어려웠다. 그래도 혁명가들은 사랑했다. 여성 혁명가에게 사랑은 더 간단치 않았고, 삶은 종종 훨씬 가혹했다. 그래도 사랑한 이들이 있어 사랑의 위대한 무조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경이 앞에 경의를.기자명조형근 (동네 사회학자)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바베트의 만찬#파리코뮌#드미트리예프#김알렉산드라#이덕요#이현경#안광천#한위건#혁명가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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